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인생 카페를 만났다.


비에이에 있는 '키타코보.'

'설렘두배 훗카이도' 책을 통해 이 카페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읽었던 것이 방문 이유의 전부다.


사실 갈 곳이 많아 굳이 이 곳을 방문할 필요는 없었다. 렌트카를 타고 여기저기 명소와 맛집을 찾아다니느라 키타코보는 아예 잊고 있기도 했고.


우리는 비에이 명물인 '마일드 세븐', '켄과 메리의 나무', '크리스마스 트리'를 본 후 후라노로 넘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를 가리켰고 1시간 거리인 후라노까지 갈 에너지가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탁신관은 하필 문이 잠긴 상태.


탁신관 옆에 서 있는 나무와 눈 언덕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는 게 이곳에서 건진 거라면 건진 것. 삼각대를 펼쳐놓고 사진을 찍는데 눈바람이 휘몰아쳤다. 너무 추웠다. 


거기다 우리 둘 다 화장실이 급했다. 맞은편에 공공화장실이 있었지만 야속하게도 문은 잠겼고...

발만 동동 굴리다가 "그럼 아까 책에서 봤던 그 카페로 가자"고 했다. 탁신관에서 가까웠다. 점심 때 들른 맛집 준페이 근처였다.


그래서 가게 된 키타코보는, 비에이에 다시 찾아갈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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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키타코보는 따뜻함을 가득 채워놓았다. 들어가자 부드러운 재즈 피아노가 우리를 반겼다. 일본음식점처럼 돼 있는 일자형 테이블에 앉자 깨끗한 창밖으로 소복한 눈이 보였다.

소품 하나하나에는 주인의 애정과 정성이 느껴진다. 


주인아저씨가 내려준 콩커피는 '처음 맛보는 커피'였다. 콩과 커피를 반반씩 섞었다는 이곳만의 특색있는 커피는

보리차를 떠올리게 했다. 콩의 고소한 맛과 커피가 완벽한 조화를 이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부드러운 커피차. 추위에 떨던 몸은 물론 마음까지 탁 풀어지며 긴 숨을 내뱉었다.





2층에 올라가니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여우 한 마리가 있다. 와.... 가슴에 뭔가가 쑥 밀고 들어온다.




테라스에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눈, 아름다운 사진, 오밀조밀 사랑스러운 소품, 여유가 흐르는 피아노..

키타코보에 있자니 뭔가 벅차오른다. 행복이 뭔지,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주민들이 편안하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주인아저씨와 대화를 나눈다. 새삼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나도 끼고 싶었다. 여기서 살면 행복해요? 저도 이런 곳에서 커피 내리면서 살고 싶어요. 

 

저녁 6시면 이곳 문을 닫는다고 한다. 주인아저씨가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일상을 해치지 않는다.


훗카이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난 망설이지 않고 이곳이라고 할 것이다. 

노보리베츠, 오타루, 삿포로를 거쳐 마지막 여행지 비에이에서 뜻밖의 선물처럼 만난 곳. 

물론 우리는 운이 좋았다. 키타코보를 찾았을 때 손님은 주민 한명밖에 없었으니까. 어느 블로그에선 사람이 꽉 차 붐볐다고 했다. 우리는 평화롭고 따뜻한 순간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어 행복했다. 


by 료범 2017. 3. 5. 18:19





한 여자가 주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부담스럽기만 한 토마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구속되는 것을 끔찍해 한다. 그에게 존재란 가벼운 것이다. 반대로, 테레자는 토마스가 자신만을 바라봐 주길 바란다. 그녀에게 존재는 지극히 무거운 것이므로.

그 둘의 충돌은 삶에 대한 가치관의 충돌이다. 삶은 무거운 걸까, 가벼운걸까.

사실, 두 사람이 가진 사랑과 삶에 대한 가치관은 '같은 전제'에서 나온다. '인생은 한번뿐이기 때문에' 인생의 짝과 평생 마음을 나눠야하고, '인생은 한번뿐이므로'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눠야 한다. 토마스와 테레자는 같은 전제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했을 뿐.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아니다. Einmal ist keinmal. 한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허락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려는 토마스..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싶은 테레자..

이 중의적 말을 곱씹으며 흘러흘러 가다보면 결국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하는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토마스와 테레자는 모두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산다는 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너무나도 철학적이고, 매력적인 책.



[가벼움과 무거움]


삶은 항상 밑그림과도 같은 것이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무거움),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가벼움)


[슬픔과 행복]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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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그의 침대 머리캍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그는 그녀 곁에서 죽고 싶었다고 확신했는데, 그 감정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다. 자기가 사랑의 부적격자임을 뼈져리게 깨달은 한 남자가 스스로에게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면서 빠져들었던 신경질적인 반응은 아니었을까? 동시에 그의 무의식은 너무도 비열한 나머지 이 희극은 위해서 자신의 삶에 동참할 만큼 격상될 기회라곤 거의 없는 촌구석의 불쌍한 종업원을 선택한 것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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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테레자와 함께 산 칠 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 시절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우연]


-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길 수 있다. p.21


-테레자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p87)

그 술집에 토마시가 있었다는 것은 테레자에게 있어 절대적 우연의 발현이다. 테레자는 카운터로 코냑을 가지러 가면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베토벤의 음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베토벤은 그녀가 희구하던 세계의 이미지, ‘저쪽’ 세계의 이미지가 되었다. 지금 카운터에서 코냑을 들고 토마시에게 다가가는 그녀는 이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호감이 가는 이 낯선 남자에게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들리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 토마시 대신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자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 싹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베토벤과 푸줏간 주인의 만남 역시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지만.) 그녀는 그 음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그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p93)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그가 아파트 문 앞에 나타났고, 잠시 후 프라하의 교회 종이 6시를 알렸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6시에 일을 끝마쳤다. 그녀는 노란 벤치에 앉아 있던 그를 마주 보았고 쨍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아니다, 그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민으로부터 그녀를 불쑥 구원하고 새로운 삶의 욕구를 그녀 가슴에 채워 준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의 의미였다. 다시 한 번 우연의 새가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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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나 때문에 질투한 게 사실이야?” 그녀는 마치 노벨상 수상자로 지목되었으나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사람처럼 수십 번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고 방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머지않아 질투심을 갖기 된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토마시에게 그녀의 질투심은 노벨상이 아니라, 죽기 전 겨우 한두 해 정도만 벗어날 수 있었던 짐이었다.


[육체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녀가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 욕실을 잠그는 것은 금지였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를 바 없다. 너에겐 수줍어 할 권리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감출 이유가 없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토마시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 보낸 셈이다.


-어머니는 요란하게 코를 풀고 자기 성생활에 대해 구석구석 털어놓고 틀니를 꺼내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든 행동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내팽개치려는 유일하고 격렬한 몸짓이었다. 그녀는 수줍음을 자기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


그녀는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추억]


-사비나의 삶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는 영원히 되풀이되었으며 매번 다른 의미를 띠었다. 그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산모자를 거쳤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헤라크레이토스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대상이 매번 다른 의미를 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켰다.


-이제 아마도 사비나와 프란츠를 갈라놓은 심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그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귀담아 들었고, 그녀 역시 그의 말을 똑같이 탐욕적으로 들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말의 논리적 의미는 정황하게 이해했으나 이 말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상식은 열여덟 나이에 얻은 모든 편견들의 집합체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프란츠는 책에 파묻힌 그의 삶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그가 비현실적이라 판단했던 것(도서관에 고립된 그의 연구 생활)이 그의 현실이며, 그가 현실이라 간주했던 시위 행렬은 하나의 볼거리, 춤, 축제, 달리 말하면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는 데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사비나와 프란츠 - 사랑의 내밀성]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프란츠는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함. 그러나 여기서 사비나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됨. 첫째, 이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둘째, 이 말 때문에 프란츠는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한 것.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환상 속에 사는 프란츠..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그의 자유와 새로운 삶이 부여한 그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희열, 이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들 사랑을 위해 매번 가슴 조이던 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신으로 변모한 사비나와 함께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


[카레닌의 미소]


자기와 비슷한 대상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아무런 미덕도 아니다. (469)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순간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낙원에서는 인간이 아직 인간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아직 인간의 노정에 던져지지 않았던 것이다.


낙원에 대한 향수,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고 싶지 않은 욕망이다.


개는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 카레닌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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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료범 2015. 3. 30. 15:58



매일 보던 버스 창밖 풍경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68번이나 108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다 보면 언제나 지나치던 곳이다. 오른쪽 창밖으로 일렬로 늘어선 상점들이 보였다. 족발가게, 미용실, 밥집, 호프집. 모두 동네가게다. 늘 보던 풍경인데 그날따라 가게 내부가 눈 안에 들어왔다.


대여섯 평이나 됐을까, 작은 식당 안에서 젊은 여자와 남자가 마주보며 늦은 식사를 하고 있다. 둘 다 앞치마를 두른 것을 보니 부부가 주인인 모양이다. 여자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떠 있다. 손님상에 나가는 상이 어떤지 몰라도 그들 앞에 놓인 상은 소박하다. 된장국과 쌀밥, 한두 가지 반찬이 전부다.


식당 옆 미용실에는 중년 여성이 낡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낮에는 붐볐을 미용실을 드라이기 대신 뉴스 소리가 채운다. 족발가게 아저씨는 고기를 썰다 말고 스마트폰을 보며 웃는다. 인기 야식 메뉴인만큼 부지런히 썰어야 손님에게 족발을 내어줄 터인데, 손님이 없는 틈을 이용해 짧은 오락을 즐기고 있는 거다. 가게 내부 모습 하나 하나가 장면이었다. 장면들이 모여 파노라마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평소에는 왜 보지 못했을까.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는 분명 누군가가 밥을 지어 팔고 타인의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고기를 썰어가며 살고 있을 텐데. 그들은 꿈에 부푼 신혼부부이거나 이제 막 손자를 본 누군가의 할머니거나 대학생 아들을 둔 아버지일 텐데.


무심코 한 덩어리로 묶어 슥 보고 지나간 그 자리에도 ‘사람’이 있었다. 그 곳은 각자의 사연과 행복이 고스란히 응집된 삶의 터였다. 버스를 타고 향하는 ‘내 집’에만 따뜻함과 웃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의도치 않게 타인의 삶을 본 후 느껴지는 것은 동질감이었다. ‘당신들도 나와 같았구나’ 하는 마음.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삶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들과 나는 ‘우리’가 된다.


성석제는 <투명인간>에서 내내 우리의 삶을 보여준다. 아주 세밀하게. 그들의 삶을 바로 가까이서 보는 듯 묘사해 낸다. 파노라마 스크린처럼, 투명인간 속 인물들의 삶이 펼쳐진다. 성석제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 땅에 사는 대다수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를 보여준다. 만수, 금희, 명희, 석수, 옥희, 백수의 삶을 통해서 말이다.


스토리의 끝은 비극적이다. 갖은 고군분투를 감내한 평범한 이들은 결국 투명인간이 되어 사라져 버린다. 공장에 다니며 대학 다닐 꿈에 부푼 명희가 연탄가스를 마셔 바보가 되고, 가족밖에 몰랐던 만수가 수천만 원 빚을 지고, 성공만을 꿈꾸며 가족까지 버린 석수가 공안에 끌려간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나는 만수, 금희, 명희, 옥희, 백수, 석수의 삶이 오늘날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너와 나의 삶은 다르다고 눈길을 돌리지만 사실은 '너와 나는 같다'고 느꼈던 버스 안의 감정이 떠올랐다. 만수를 비롯한 ‘그들’의 삶이 나의 삶처럼 다가왔다.


<투명인간>은 어딘가에 있을 사람,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했던 사람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어줬다. 그리고 하나로 묶인 우리가 서로를 보지 않으면 결국 투명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했다. 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으면 남남이 된다. 타인의 세계는 알 필요 없다는 남남주의는 우리 모두를 투명인간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만수와 옥희 등 투명인간이 된 인물들은 사회 계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이자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었다.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너와 나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너도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만수가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 마지막 장에서 성석제는 말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기억에 남는 장면]


언니가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보고는 그걸 따다가 깨끗한 접시로 얹어서 오빠 머리맡에 가져다두고는 말했다.


-오빠, 오빠한테 드릴 게 이거밖에 없어요. 미안합니다.


오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고드름을 따느라고 얼마나 손이 시렸겠느냐고 언니의 빨간 손을 잡아주었다. 만수가 그 광경을 보고는 밖에 나가서 대나무 아래의 깨끗한 눈을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아왔다. 만수의 얼어터진 손 이곳저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엄마가 큰일 아니면 절대로 꺼내는 일이 없는 설탕을 가져왔다. 고드름과 눈 위에 설탕을 살살 뿌려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빙수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울다 웃다 했었다. (명희, p.46)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같은 콩으로 담근 장이라도 엄마가 담근 간장, 된장, 고추장은 온 마을에서 맛있기로 소문났다... 김장을 할 때 우리 집은 무를 넣은 독을 땅에 여럿 묻었다. 동치미가 아니라 짠지였다. 무를 깨끗이 씻고 소금 간을 했을 뿐인데 그게 잘 익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한겨울 밤에 그 무를 쫑쫑 채 썰어 양푼에 담고 밥에 고추장을 넣어 썩썩 비벼서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으면 어떤 고생도 같이 견뎌나갈 만한 것처럼 생각되곤 했다. 처마 밑 그늘에 매달아 겨울 찬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하며 잘 마른 무시래기에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은 겨울 저녁의 추위를 달래주었다.


부엌 바닥은 마당보다 두걸음쯤 내려오게 낮았고 컴컴한 구석에 수숫단이며 나뭇단이 쌓여 있었다... 밥을 지을 때 장작으로 불을 때면 불 조절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아까워서 쉽게 쓰지를 못했다. 그러니 아궁이 연료는 북데기나 검불, 솔가지처럼 매운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이기 쉬웠다. 내가 부엌에서 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짓다보면 방 안에서는 갈라진 구들 사이로 연기가 솟아올라 동생들이 울고 굴뚝에서 나온 연기에 무슨 밥 냄새라도 숨어 있는지 소와 돼지가 밥 달라고 울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했다. 저녁나절에는 캄캄해서 손가락도 안 보이는 부엌에서 질그릇 함지에 그릇을 부시고 솥을 헹군 개숫물을 담아서 끙끙거리면서 마당 바깥까지 들고 나와서 버려야 했다.


겨울에 홑저고리 바람으로 계곡에 내려가 얼음을 깨고 한 빨래를 광주리에 넣고 머리에 이고 돌아오면 도중에 빨래가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금희, p.70)


by 료범 2015. 2. 2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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