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인생 카페를 만났다.


비에이에 있는 '키타코보.'

'설렘두배 훗카이도' 책을 통해 이 카페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읽었던 것이 방문 이유의 전부다.


사실 갈 곳이 많아 굳이 이 곳을 방문할 필요는 없었다. 렌트카를 타고 여기저기 명소와 맛집을 찾아다니느라 키타코보는 아예 잊고 있기도 했고.


우리는 비에이 명물인 '마일드 세븐', '켄과 메리의 나무', '크리스마스 트리'를 본 후 후라노로 넘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를 가리켰고 1시간 거리인 후라노까지 갈 에너지가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탁신관은 하필 문이 잠긴 상태.


탁신관 옆에 서 있는 나무와 눈 언덕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는 게 이곳에서 건진 거라면 건진 것. 삼각대를 펼쳐놓고 사진을 찍는데 눈바람이 휘몰아쳤다. 너무 추웠다. 


거기다 우리 둘 다 화장실이 급했다. 맞은편에 공공화장실이 있었지만 야속하게도 문은 잠겼고...

발만 동동 굴리다가 "그럼 아까 책에서 봤던 그 카페로 가자"고 했다. 탁신관에서 가까웠다. 점심 때 들른 맛집 준페이 근처였다.


그래서 가게 된 키타코보는, 비에이에 다시 찾아갈 이유가 되었다.



.

.

.

.

.

.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키타코보는 따뜻함을 가득 채워놓았다. 들어가자 부드러운 재즈 피아노가 우리를 반겼다. 일본음식점처럼 돼 있는 일자형 테이블에 앉자 깨끗한 창밖으로 소복한 눈이 보였다.

소품 하나하나에는 주인의 애정과 정성이 느껴진다. 


주인아저씨가 내려준 콩커피는 '처음 맛보는 커피'였다. 콩과 커피를 반반씩 섞었다는 이곳만의 특색있는 커피는

보리차를 떠올리게 했다. 콩의 고소한 맛과 커피가 완벽한 조화를 이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부드러운 커피차. 추위에 떨던 몸은 물론 마음까지 탁 풀어지며 긴 숨을 내뱉었다.





2층에 올라가니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여우 한 마리가 있다. 와.... 가슴에 뭔가가 쑥 밀고 들어온다.




테라스에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눈, 아름다운 사진, 오밀조밀 사랑스러운 소품, 여유가 흐르는 피아노..

키타코보에 있자니 뭔가 벅차오른다. 행복이 뭔지,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주민들이 편안하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주인아저씨와 대화를 나눈다. 새삼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나도 끼고 싶었다. 여기서 살면 행복해요? 저도 이런 곳에서 커피 내리면서 살고 싶어요. 

 

저녁 6시면 이곳 문을 닫는다고 한다. 주인아저씨가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일상을 해치지 않는다.


훗카이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난 망설이지 않고 이곳이라고 할 것이다. 

노보리베츠, 오타루, 삿포로를 거쳐 마지막 여행지 비에이에서 뜻밖의 선물처럼 만난 곳. 

물론 우리는 운이 좋았다. 키타코보를 찾았을 때 손님은 주민 한명밖에 없었으니까. 어느 블로그에선 사람이 꽉 차 붐볐다고 했다. 우리는 평화롭고 따뜻한 순간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어 행복했다. 


by 료범 2017. 3. 5. 18:19





한 여자가 주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부담스럽기만 한 토마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구속되는 것을 끔찍해 한다. 그에게 존재란 가벼운 것이다. 반대로, 테레자는 토마스가 자신만을 바라봐 주길 바란다. 그녀에게 존재는 지극히 무거운 것이므로.

그 둘의 충돌은 삶에 대한 가치관의 충돌이다. 삶은 무거운 걸까, 가벼운걸까.

사실, 두 사람이 가진 사랑과 삶에 대한 가치관은 '같은 전제'에서 나온다. '인생은 한번뿐이기 때문에' 인생의 짝과 평생 마음을 나눠야하고, '인생은 한번뿐이므로'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눠야 한다. 토마스와 테레자는 같은 전제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했을 뿐.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아니다. Einmal ist keinmal. 한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허락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려는 토마스..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싶은 테레자..

이 중의적 말을 곱씹으며 흘러흘러 가다보면 결국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하는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토마스와 테레자는 모두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산다는 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너무나도 철학적이고, 매력적인 책.



[가벼움과 무거움]


삶은 항상 밑그림과도 같은 것이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무거움),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가벼움)


[슬픔과 행복]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그는 그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그의 침대 머리캍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그는 그녀 곁에서 죽고 싶었다고 확신했는데, 그 감정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다. 자기가 사랑의 부적격자임을 뼈져리게 깨달은 한 남자가 스스로에게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면서 빠져들었던 신경질적인 반응은 아니었을까? 동시에 그의 무의식은 너무도 비열한 나머지 이 희극은 위해서 자신의 삶에 동참할 만큼 격상될 기회라곤 거의 없는 촌구석의 불쌍한 종업원을 선택한 것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테레자와 함께 산 칠 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 시절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우연]


-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길 수 있다. p.21


-테레자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p87)

그 술집에 토마시가 있었다는 것은 테레자에게 있어 절대적 우연의 발현이다. 테레자는 카운터로 코냑을 가지러 가면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베토벤의 음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베토벤은 그녀가 희구하던 세계의 이미지, ‘저쪽’ 세계의 이미지가 되었다. 지금 카운터에서 코냑을 들고 토마시에게 다가가는 그녀는 이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호감이 가는 이 낯선 남자에게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들리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 토마시 대신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자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 싹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베토벤과 푸줏간 주인의 만남 역시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지만.) 그녀는 그 음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그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p93)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그가 아파트 문 앞에 나타났고, 잠시 후 프라하의 교회 종이 6시를 알렸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6시에 일을 끝마쳤다. 그녀는 노란 벤치에 앉아 있던 그를 마주 보았고 쨍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아니다, 그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민으로부터 그녀를 불쑥 구원하고 새로운 삶의 욕구를 그녀 가슴에 채워 준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의 의미였다. 다시 한 번 우연의 새가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


[질투]

-“나 때문에 질투한 게 사실이야?” 그녀는 마치 노벨상 수상자로 지목되었으나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사람처럼 수십 번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고 방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머지않아 질투심을 갖기 된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토마시에게 그녀의 질투심은 노벨상이 아니라, 죽기 전 겨우 한두 해 정도만 벗어날 수 있었던 짐이었다.


[육체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녀가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 욕실을 잠그는 것은 금지였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를 바 없다. 너에겐 수줍어 할 권리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감출 이유가 없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토마시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 보낸 셈이다.


-어머니는 요란하게 코를 풀고 자기 성생활에 대해 구석구석 털어놓고 틀니를 꺼내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든 행동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내팽개치려는 유일하고 격렬한 몸짓이었다. 그녀는 수줍음을 자기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


그녀는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추억]


-사비나의 삶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는 영원히 되풀이되었으며 매번 다른 의미를 띠었다. 그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산모자를 거쳤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헤라크레이토스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대상이 매번 다른 의미를 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켰다.


-이제 아마도 사비나와 프란츠를 갈라놓은 심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그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귀담아 들었고, 그녀 역시 그의 말을 똑같이 탐욕적으로 들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말의 논리적 의미는 정황하게 이해했으나 이 말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상식은 열여덟 나이에 얻은 모든 편견들의 집합체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프란츠는 책에 파묻힌 그의 삶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그가 비현실적이라 판단했던 것(도서관에 고립된 그의 연구 생활)이 그의 현실이며, 그가 현실이라 간주했던 시위 행렬은 하나의 볼거리, 춤, 축제, 달리 말하면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는 데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사비나와 프란츠 - 사랑의 내밀성]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프란츠는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함. 그러나 여기서 사비나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됨. 첫째, 이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둘째, 이 말 때문에 프란츠는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한 것.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환상 속에 사는 프란츠..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그의 자유와 새로운 삶이 부여한 그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희열, 이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들 사랑을 위해 매번 가슴 조이던 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신으로 변모한 사비나와 함께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


[카레닌의 미소]


자기와 비슷한 대상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아무런 미덕도 아니다. (469)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순간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낙원에서는 인간이 아직 인간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아직 인간의 노정에 던져지지 않았던 것이다.


낙원에 대한 향수,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고 싶지 않은 욕망이다.


개는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 카레닌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 모른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석제-투명인간  (0) 2015.02.24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 -제이슨 머코스키  (0) 2014.07.25
별을 스치는 바람 -이정명  (0) 2014.07.17
by 료범 2015. 3. 30. 15:58



매일 보던 버스 창밖 풍경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68번이나 108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다 보면 언제나 지나치던 곳이다. 오른쪽 창밖으로 일렬로 늘어선 상점들이 보였다. 족발가게, 미용실, 밥집, 호프집. 모두 동네가게다. 늘 보던 풍경인데 그날따라 가게 내부가 눈 안에 들어왔다.


대여섯 평이나 됐을까, 작은 식당 안에서 젊은 여자와 남자가 마주보며 늦은 식사를 하고 있다. 둘 다 앞치마를 두른 것을 보니 부부가 주인인 모양이다. 여자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떠 있다. 손님상에 나가는 상이 어떤지 몰라도 그들 앞에 놓인 상은 소박하다. 된장국과 쌀밥, 한두 가지 반찬이 전부다.


식당 옆 미용실에는 중년 여성이 낡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낮에는 붐볐을 미용실을 드라이기 대신 뉴스 소리가 채운다. 족발가게 아저씨는 고기를 썰다 말고 스마트폰을 보며 웃는다. 인기 야식 메뉴인만큼 부지런히 썰어야 손님에게 족발을 내어줄 터인데, 손님이 없는 틈을 이용해 짧은 오락을 즐기고 있는 거다. 가게 내부 모습 하나 하나가 장면이었다. 장면들이 모여 파노라마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평소에는 왜 보지 못했을까.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는 분명 누군가가 밥을 지어 팔고 타인의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고기를 썰어가며 살고 있을 텐데. 그들은 꿈에 부푼 신혼부부이거나 이제 막 손자를 본 누군가의 할머니거나 대학생 아들을 둔 아버지일 텐데.


무심코 한 덩어리로 묶어 슥 보고 지나간 그 자리에도 ‘사람’이 있었다. 그 곳은 각자의 사연과 행복이 고스란히 응집된 삶의 터였다. 버스를 타고 향하는 ‘내 집’에만 따뜻함과 웃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의도치 않게 타인의 삶을 본 후 느껴지는 것은 동질감이었다. ‘당신들도 나와 같았구나’ 하는 마음.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삶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들과 나는 ‘우리’가 된다.


성석제는 <투명인간>에서 내내 우리의 삶을 보여준다. 아주 세밀하게. 그들의 삶을 바로 가까이서 보는 듯 묘사해 낸다. 파노라마 스크린처럼, 투명인간 속 인물들의 삶이 펼쳐진다. 성석제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 땅에 사는 대다수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를 보여준다. 만수, 금희, 명희, 석수, 옥희, 백수의 삶을 통해서 말이다.


스토리의 끝은 비극적이다. 갖은 고군분투를 감내한 평범한 이들은 결국 투명인간이 되어 사라져 버린다. 공장에 다니며 대학 다닐 꿈에 부푼 명희가 연탄가스를 마셔 바보가 되고, 가족밖에 몰랐던 만수가 수천만 원 빚을 지고, 성공만을 꿈꾸며 가족까지 버린 석수가 공안에 끌려간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나는 만수, 금희, 명희, 옥희, 백수, 석수의 삶이 오늘날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너와 나의 삶은 다르다고 눈길을 돌리지만 사실은 '너와 나는 같다'고 느꼈던 버스 안의 감정이 떠올랐다. 만수를 비롯한 ‘그들’의 삶이 나의 삶처럼 다가왔다.


<투명인간>은 어딘가에 있을 사람,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했던 사람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어줬다. 그리고 하나로 묶인 우리가 서로를 보지 않으면 결국 투명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했다. 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으면 남남이 된다. 타인의 세계는 알 필요 없다는 남남주의는 우리 모두를 투명인간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만수와 옥희 등 투명인간이 된 인물들은 사회 계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이자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었다.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너와 나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너도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만수가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 마지막 장에서 성석제는 말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기억에 남는 장면]


언니가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보고는 그걸 따다가 깨끗한 접시로 얹어서 오빠 머리맡에 가져다두고는 말했다.


-오빠, 오빠한테 드릴 게 이거밖에 없어요. 미안합니다.


오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고드름을 따느라고 얼마나 손이 시렸겠느냐고 언니의 빨간 손을 잡아주었다. 만수가 그 광경을 보고는 밖에 나가서 대나무 아래의 깨끗한 눈을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아왔다. 만수의 얼어터진 손 이곳저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엄마가 큰일 아니면 절대로 꺼내는 일이 없는 설탕을 가져왔다. 고드름과 눈 위에 설탕을 살살 뿌려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빙수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울다 웃다 했었다. (명희, p.46)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같은 콩으로 담근 장이라도 엄마가 담근 간장, 된장, 고추장은 온 마을에서 맛있기로 소문났다... 김장을 할 때 우리 집은 무를 넣은 독을 땅에 여럿 묻었다. 동치미가 아니라 짠지였다. 무를 깨끗이 씻고 소금 간을 했을 뿐인데 그게 잘 익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한겨울 밤에 그 무를 쫑쫑 채 썰어 양푼에 담고 밥에 고추장을 넣어 썩썩 비벼서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으면 어떤 고생도 같이 견뎌나갈 만한 것처럼 생각되곤 했다. 처마 밑 그늘에 매달아 겨울 찬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하며 잘 마른 무시래기에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은 겨울 저녁의 추위를 달래주었다.


부엌 바닥은 마당보다 두걸음쯤 내려오게 낮았고 컴컴한 구석에 수숫단이며 나뭇단이 쌓여 있었다... 밥을 지을 때 장작으로 불을 때면 불 조절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아까워서 쉽게 쓰지를 못했다. 그러니 아궁이 연료는 북데기나 검불, 솔가지처럼 매운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이기 쉬웠다. 내가 부엌에서 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짓다보면 방 안에서는 갈라진 구들 사이로 연기가 솟아올라 동생들이 울고 굴뚝에서 나온 연기에 무슨 밥 냄새라도 숨어 있는지 소와 돼지가 밥 달라고 울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했다. 저녁나절에는 캄캄해서 손가락도 안 보이는 부엌에서 질그릇 함지에 그릇을 부시고 솥을 헹군 개숫물을 담아서 끙끙거리면서 마당 바깥까지 들고 나와서 버려야 했다.


겨울에 홑저고리 바람으로 계곡에 내려가 얼음을 깨고 한 빨래를 광주리에 넣고 머리에 이고 돌아오면 도중에 빨래가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금희, p.70)


by 료범 2015. 2. 24. 15:06



일시적인 권태기일까? 어느 순간, 무거운 책이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책을 사서 수집하고 읽는 것을 즐긴다. 남자친구가 아이패드를 사줬을 때 처음으로 전자책을 읽어 봤지만, 이내 교보문고 어플리케이션을 꺼 버렸다. 지나치게 선명한 LED 화면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내 마음은 종이책을 밀어내고 있다. 종이책의 ‘무게’가 나를 늘 괴롭게 만든 탓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비교할 대상이 생기면 그 쪽으로 눈길이 가기 마련인 법. 눈 아픈 태블릿 PC가 아니라, 종이책의 느낌을 그대로 구현하는 전자책 단말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나의 관심은 전자책에 쏠려 있다. 이것이 가벼운 권태기인지, 결별을 준비할 만큼 큰 변화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오로지 종이책만을 외곬으로 읽던 내가 전자책 단말기를 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나를 변화시킨 건 한 권의 책이다. 제이슨 머코스키의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 그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의 e-북 리더기 ‘킨들’을 개발했다. 그는 전자책을 두고 ‘항생제 발명과 전기 발명 이후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제품에 대한 자신감 때문은 아니다. 머코스키는 항생제나 전기가 인류사에 거대한 물주기를 만들어 냈듯, 킨들이 인류 문화의 큰 변화를 상징한다고 봤다. 우리가 종이책을 보지 않고 전자책을 보는 것은 단순히 행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류가 이때까지 써 온 문화와 관습, 지식 계승 방식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토판,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기원전 5세기의 양피지 두루마리, 종이... 인류는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디지털화'한 책은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기록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인류가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독서 방식을 바꾼다면, 종이책이 만든 문화는 사라질 것이다. 종이책의 묵직한 두께감, 오래된 서재에서 나는 먼지 냄새, 책장 속에 숨겨진 연애편지, 손 글씨, 꽃잎을 말린 책갈피, 책을 빌려주던 정겨움. 오감(五感)을 자극하던 종이책은 사라지고, 가볍고 매끈한 기계가 책의 모습을 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머코스키의 소회는 이렇다.


<전자책에서는 퀴퀴한 도서관 냄새나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 책갈피에 끼워두고 잊어버렸던 라일락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다. 포름알데히드와 플라스틱 냄새나 과열된 배터리의 금속 냄새가 날 것이다.>


<그 책들이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책이 나를 어떻게 회상하는지, 페이지 사이에 나의 어떤 부분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내 삶의 간이역과도 같다. 내 책의 페이지 사이에는 내 삶의 역사가 담긴 캡슐이 들어 있다.>


독서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전자책은 독서를 소통의 영역으로 바꿀 것이라고 한다. 전자책 단말기가 조금 더 발전하면, 우리는 책의 챕터나 페이지에서 전 세계의 독자가 남긴 설명이나 주석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이 특정 대목에서 어떻게 느꼈는지 즉각 볼 수 있고, 그 페이지에서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물론 저자와도 말이다.


<독서는 한 인간과 한 권의 책 사이에 이루어지는 고독한 상호관계다. 독서 경험은 사회적인 본성과 상반되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사회적인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 독서 경험을 고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은 클릭 한 번만으로 책의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여러 작가들의 서로 상반되면서도 다양한 통찰력을 얻고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링크를 통해서 작가는 당신이 읽고 있는 바로 그 페이지에서 토론을 벌일 수 있고 당신은 어떤 작가나 아이디어가 승리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구리 광맥이나 금 광맥을 따라가듯이 서로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다.>


또 중고책 시장의 모습도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전자책에는 중고책이 없다. 늘 새것으로 유지된다. 지금은 전자책을 사면, 단말기 5개 정도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안다. 이것을 누군가에게 싸게 팔거나 빌려줄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생기면 중고책 시장은 또 다른 모습으로 떠오를 것이다.


<전자책은 종이책 종말의 전조일까, 아니면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구원자일까? 전자책은 우리의 독서 경험을 고양할까, 아니면 오히려 독서에서 멀어지게 할까? 이 실험적인 책의 형태는 책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책을 인류 문화의 명예로운 자리에 올려놓을 것인가? 독서 습관이 바뀌면 우리는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을까?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머코스키가 고민하는 것처럼, 지금은 중간에 걸친 시대기 때문에 독서문화의 미래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터넷이 발달하는 시대도 겪었다. 완전히 아날로그 시대도, 디지털 시대도 아닌 ‘낀 세대’. 디지털 기술의 실험적 발명이 왕성하고 앞으로 수 년 간 그럴 것이다. 분명, 독서 문화는 바뀌고 있다. 서서히 과도기를 향해 갈 것이고, 독서의 많은 부분을 전자책이 차지하게 될 터다. 우리나라는 전자책 시장이 아직 1~2%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시장은 13%정도이며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다. 아마존에서 팔리는 책의 절반이 전자책이라고 하니, 독서 문화의 변화가 얼마나 빨리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이 된다. 머코스키는 10년 안에 인류의 절반이 전자책을 이용할 것이라 분석한다. 인류가 갈수록 기술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게 그 이유다.


<미국에서 냉장고가 처음 선보인 후 미국 전체 가구 중 50퍼센트가 냉장고를 보유하기까지 83년이 걸렸다. 수세식 변기는 냉장고보다 늦게 발명되었지만 조기다수수용자, 즉 인구의 50퍼센트가 사용할 때까지 겨우 43년이 걸렸다. 최근에 발명된 제품들을 보면 이러한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가구의 절반에 전기가 공급되는 데 22년이 걸렸고, 라디오는 19년, TV는 15년, 인터넷은 겨우 10년이 걸렸다.>


나 같은 외곬 역시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전자책 시장도 낙관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머코스키에 따르면, 전자책을 구입하면 사람들은 전보다 더 책을 많이 읽는다. 이것은 여러 나라 시장에서 이미 증명됐다고 말한다.


<나는 종이책의 한계를 알고, 전자책이 종이책의 자연스러운 계승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우리가 전자책 독자로서 책 읽기가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경험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독서 문화도 진화하고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가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인쇄술도 수세기 동안 진화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쇄술은 500년 전에 시작되었고, 이제 발전할 부분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든 종이신문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종이책은 이미 전자책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 년 전부터 줄기차게 제기 된 ‘신문의 위기’는 어떤 방향으로 논의될까? 머코스키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장단점을 모두 인정하지만, 본질적으로 문장을 읽는 행위에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신문 역시 종이로 읽는 것과 전자 단말기로 읽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는 말이 된다. 신문은 정녕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디지털 신문이 아닌 ‘종이 신문’의 유용함과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종이신문은 종이책과는 다르게 ‘지면’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종이신문은 지면구성을 통해 기사를 완성한다. 어느 곳에 어떤 크기의 박스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의제 설정 효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디지털 신문이 가지지 못한 기능이라고 본다. 현재 포털에서 나열식으로 전하는 기사는 우리에게 허기만을 남긴다. 물론 신문 지면을 그대로 옮긴 ‘아이서퍼’와 같은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그러나 작은 모니터 속에서 좌우로 이동하며 지면을 읽는 것과 종이를 펼쳐 전체를 읽는 것은 분명 다르다. 종이신문 하나를 다 읽었을 때의 안정감과 포만감은 결코 디지털이 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종이신문은 종이책과 다르게, 연애편지나 책갈피를 종이 사이에 끼워 넣을 수 없다. 일일이 스크랩을 하지 않는 이상 한번 보고 버리는 것이 종이신문이다. ‘일회용’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종이신문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 예컨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갱지 냄새 같은 것이 종이책이 주는 추억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종이’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독자가 원하는 한, 종이신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론, 종이 신문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는 모습도 상상할 수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앞으로 신문은 점점 ‘잡지화’할 것이라고 한다. 속보성 뉴스는 지면에서 사라지고 화려한 그래픽과 심층기사, 기획보도가 지면을 채울 것이라는 이야기다. 기로에 서 있는 종이 신문은 이미 몇 해 전부터 단순 사건사고 기사 대신 심층기사의 비율을 늘려왔다. ‘종이’신문이 가진 지면의 장점과 독자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심층기사가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한층 업그레이드된 종이신문의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머코스키의 말이 떠오른다. 


‘전자책은 종이책 종말의 전조일까, 아니면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구원자일까?’ 


종이신문의 위기는 종이신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지도 모른다. 세계신문협회는 지난해에 전세계적으로 신문 구독자 수가 2% 증가했다고 밝혔다. 종이신문과 디지털의 결합 덕택이다. 수전 라이트 캐나다신문 마케팅 혁신 담당 부사장은, '모바일 덕분에 오히려 뉴스 소비가 늘었다'고 말했다. 디지털의 물결이 종이신문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 준 셈이다. 전자책이 인류의 독서량을 늘렸듯. 


물론 우리는 부정적인 현상을 더 많이 봤다. 적자에 허덕이는 워싱턴 포스트가 아마존에 매각되던던 날 세계는 경악했다. 영국의 워싱턴 포스트가 온라인 서점에 인수될 정도면 다른 종이신문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 아닌가. 지면을 포기하는 것으로 생존을 모색하는 매체도 있었다. 영국 더타임스는 2010년에 디지털 지면을 전면 유료화하면서 종이신문의 역사에서 한 발짝 나왔다. 지금도 전세계 곳곳에서 신문사는 고심할 것이다. 윤전기를 돌릴 것인가, 멈출 것인가. 


하지만 종이신문의 미래가 결코 암울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책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듯, 종이신문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은 채 독자를 맞이할 것기 때문이다. 나는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디오가 그랬듯 말이다. 예술작품은 아니지만, 종이책과 신문에 '아우라'라는 표현을 붙여 보고 싶다. 종이에는 종이만의 아우라가 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라 칭한 그것 말이다. 


나는 지금 종이책에 권태를 느끼지만 당분간은 종이책과 전자책을 오가며 독서를 즐길 것이다. 변함없이 가판대에서 신문과 시사잡지를 사는 한편, 종종 아이서퍼에 접속해 모니터를 통해 지면을 읽을 것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0) 2015.03.30
성석제-투명인간  (0) 2015.02.24
별을 스치는 바람 -이정명  (0) 2014.07.17
by 료범 2014. 7. 25. 00:43

<별을 스치는 바람> -이정명





<삶에는 이유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죽음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열아홉 살의 겨울,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의 첫 장을 열자 나온 세 문장이다. 삶에는 이유가 없을지언정 죽음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한 간수의 독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왜 죄 없는 이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왜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지 묻는 것 같았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일본인 간수와 조선인 죄수 윤동주의 아름다운 소통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소설이다. 곳곳에 있는 살아 숨 쉬는 시적 표현, 감수성에 푹 젖어 버렸다. 문장은 팝콘처럼 툭툭 튀어 오른다. 이정명은 문장을 시각화하는 능력이 뛰어난 듯 보인다. 그는 실체가 없는 것일지라도 눈에 훤히 보이도록 표현한다. "나의 영혼이 흰 종이 위를 꼬물거리며 검은 활자를 갉아 먹는 누에처럼 잠들고 싶었음을"과 같은 문장이 그렇다. 책을 읽고 싶다는 소망을 이토록 간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가 뒤쪽은 책의 미로였다. 수많은 책갈피 사이의 수많은 샛길들이 나를 유혹했다. 나는 혁명 전야의 파리 하수도로 숨어들기도 했고, 피가 얼어붙는 시베리아의 눈발 속에서 한 여인을 만나기도 했다. 거대한 정신의 기둥들과 문장의 거리들, 난해한 문구들의 미로와 복잡한 음절의 골목들. 낱말들은 온갖 물건들을 진열한 상점들 같았고 구두점은 오래된 가문의 문장처럼 반짝였다. 구문들은 고요하게 숨을 쉬었고 낱말들은 들릴 듯 말들 속삭였다.>


이 소설의 화자, ‘와타나베 유이치’의 독백이다. 책이라는 단순한 물건, 문장이라는 2차원적인 요소를 이렇게 표현해 낸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이렇듯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장이 많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교과서에서 접하던 윤동주의 시를 가슴으로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소설 속 화자인 와타나베 유이치는 조선인 죄수 윤동주와 검열관 스기야마 사이의 우정을 알게 되는데, 둘의 교감 도구가 바로 윤동주의 시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검열관 스기야마는 사실 시인 못지않은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스기야마는 ‘불온’한 문장을 검열하고 소각해야하지만, 윤동주의 시에 매료되고 그와 문장을 통해 교감하게 된다. 그의 시를 불태우지 않고 오히려 그가 시를 쓰도록 도와준다. (책 서평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를 ‘대결’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그들의 관계가 ‘우정’으로 연결됐다고 본다.)


윤동주의 시에는 식민지국의 비통함, 간절함, 눈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자화상’, ‘십자가’, ‘서시,’ ‘별 헤는 밤’... 스토리를 따라가던 독자는 어느새 일제시대의 조선 청년이 된다. 그의 시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 윤동주의 시는 스쳐지나가듯 읽은 수많은 시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윤동주를 만난 것만 같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화자인 와타나베 유이치의 입을 통해 일본인 간수 스기야마와 조선인 죄수 윤동주의 우정을 묘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와타나베 유이치는 주변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소설을 이끄는 것은 와타나베 유이치며, 소설을 관통하는 큰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도 그다. 유이치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승자와 패자도 없는 전쟁의 참혹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는 마리아 릴케, 앙드레 지드,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랑하는 문학도이지만, 징집서를 받는 순간 군인이 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문학을 읽을 수도, 구할 수도 없다. 그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딱딱한 명령서뿐이다. 와타나베 유이치는 스기야마와 윤동주 사이를 알게 되지만 스기야마를 반역자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이 스기야마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벌이는 일본 연구진에 환멸을 느끼고 그들에게 “악마”라고 말하지만, 자신 역시 조선인이 죽어가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자책한다. 와타나베 유이치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쟁의 의미를 묻는다.


<이 더러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일본인이었다. 전쟁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들 모두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벌어진 이 더러운 전쟁에 동의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용서받아야 할까? 아니, 우리들은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을까?>


<스무 자도 되지 않는 파편 같은 글자들, 문장을 이루지도 못하는 글자들이 나의 삶을 옥죄어 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모든 군인들은 문장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탄도 포탄도 아니었다. 그것은 글이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는 한 줄의 글로 족했다. 몇 개의 단어와 숫자, 구두점에 의해 소년들은 병사가 되고, 전장으로 이동하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 나는 죽음이 아니라 문장이 두려워 들고 있던 디킨스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디킨스는 나약해 보였다.>


와타나베 유이치는 자신이 혐오한 제국주의의 괴물이 되지 않았다. 문장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책을 사랑했고, 시로 연결된 스기야마와 윤동주를 받아들였다. 그는 윤동주가 주사를 맞은 뒤로 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의 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 슬퍼했다. 유이치는 윤동주의 마지막을 보았다.


일본인 간수 스기야마, 유이치, 조선인 죄수 윤동주를 이은 것은 평화협정 따위가 아니라 ‘시’였다. 전쟁은 얼마나 나약한가.


아래는 연합군 전범 조사관이 유이치를 심문하던 중 나온 대화다.


(연합군 전범 조사관) 허구가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와타나베 유이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죠.

(연합군 전범 조사관) 당신의 기록은 일본인에게 부끄러운 역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와타나베 유이치) 부끄러운 진실 또한 진실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운 거짓보다 부끄러운 진실을 택할 것입니다. 욕된 진실을 인정해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문단


< “책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어갈까?”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낱말과 조사와 구두점이 모인 문장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삶을 시작한다. 책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헌책방과 도서관으로 긴 여행을 한다. 누군가의 가슴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우듬지를 이루는 동안 책장은 찢어지고 표지는 낡고 글자들은 바랜다. 그리고 어느 날 먼지와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 영혼은 우리 가슴속에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책은 죽지 않는다. >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쉽게 씌어진 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0) 2015.03.30
성석제-투명인간  (0) 2015.02.24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 -제이슨 머코스키  (0) 2014.07.25
by 료범 2014. 7. 17. 22:22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