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스치는 바람> -이정명





<삶에는 이유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죽음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열아홉 살의 겨울,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의 첫 장을 열자 나온 세 문장이다. 삶에는 이유가 없을지언정 죽음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한 간수의 독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왜 죄 없는 이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왜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지 묻는 것 같았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일본인 간수와 조선인 죄수 윤동주의 아름다운 소통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소설이다. 곳곳에 있는 살아 숨 쉬는 시적 표현, 감수성에 푹 젖어 버렸다. 문장은 팝콘처럼 툭툭 튀어 오른다. 이정명은 문장을 시각화하는 능력이 뛰어난 듯 보인다. 그는 실체가 없는 것일지라도 눈에 훤히 보이도록 표현한다. "나의 영혼이 흰 종이 위를 꼬물거리며 검은 활자를 갉아 먹는 누에처럼 잠들고 싶었음을"과 같은 문장이 그렇다. 책을 읽고 싶다는 소망을 이토록 간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가 뒤쪽은 책의 미로였다. 수많은 책갈피 사이의 수많은 샛길들이 나를 유혹했다. 나는 혁명 전야의 파리 하수도로 숨어들기도 했고, 피가 얼어붙는 시베리아의 눈발 속에서 한 여인을 만나기도 했다. 거대한 정신의 기둥들과 문장의 거리들, 난해한 문구들의 미로와 복잡한 음절의 골목들. 낱말들은 온갖 물건들을 진열한 상점들 같았고 구두점은 오래된 가문의 문장처럼 반짝였다. 구문들은 고요하게 숨을 쉬었고 낱말들은 들릴 듯 말들 속삭였다.>


이 소설의 화자, ‘와타나베 유이치’의 독백이다. 책이라는 단순한 물건, 문장이라는 2차원적인 요소를 이렇게 표현해 낸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이렇듯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장이 많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교과서에서 접하던 윤동주의 시를 가슴으로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소설 속 화자인 와타나베 유이치는 조선인 죄수 윤동주와 검열관 스기야마 사이의 우정을 알게 되는데, 둘의 교감 도구가 바로 윤동주의 시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검열관 스기야마는 사실 시인 못지않은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스기야마는 ‘불온’한 문장을 검열하고 소각해야하지만, 윤동주의 시에 매료되고 그와 문장을 통해 교감하게 된다. 그의 시를 불태우지 않고 오히려 그가 시를 쓰도록 도와준다. (책 서평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를 ‘대결’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그들의 관계가 ‘우정’으로 연결됐다고 본다.)


윤동주의 시에는 식민지국의 비통함, 간절함, 눈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자화상’, ‘십자가’, ‘서시,’ ‘별 헤는 밤’... 스토리를 따라가던 독자는 어느새 일제시대의 조선 청년이 된다. 그의 시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 윤동주의 시는 스쳐지나가듯 읽은 수많은 시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윤동주를 만난 것만 같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화자인 와타나베 유이치의 입을 통해 일본인 간수 스기야마와 조선인 죄수 윤동주의 우정을 묘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와타나베 유이치는 주변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소설을 이끄는 것은 와타나베 유이치며, 소설을 관통하는 큰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도 그다. 유이치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승자와 패자도 없는 전쟁의 참혹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는 마리아 릴케, 앙드레 지드,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랑하는 문학도이지만, 징집서를 받는 순간 군인이 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문학을 읽을 수도, 구할 수도 없다. 그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딱딱한 명령서뿐이다. 와타나베 유이치는 스기야마와 윤동주 사이를 알게 되지만 스기야마를 반역자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이 스기야마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벌이는 일본 연구진에 환멸을 느끼고 그들에게 “악마”라고 말하지만, 자신 역시 조선인이 죽어가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자책한다. 와타나베 유이치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쟁의 의미를 묻는다.


<이 더러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일본인이었다. 전쟁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들 모두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벌어진 이 더러운 전쟁에 동의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용서받아야 할까? 아니, 우리들은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을까?>


<스무 자도 되지 않는 파편 같은 글자들, 문장을 이루지도 못하는 글자들이 나의 삶을 옥죄어 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모든 군인들은 문장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탄도 포탄도 아니었다. 그것은 글이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는 한 줄의 글로 족했다. 몇 개의 단어와 숫자, 구두점에 의해 소년들은 병사가 되고, 전장으로 이동하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 나는 죽음이 아니라 문장이 두려워 들고 있던 디킨스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디킨스는 나약해 보였다.>


와타나베 유이치는 자신이 혐오한 제국주의의 괴물이 되지 않았다. 문장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책을 사랑했고, 시로 연결된 스기야마와 윤동주를 받아들였다. 그는 윤동주가 주사를 맞은 뒤로 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의 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 슬퍼했다. 유이치는 윤동주의 마지막을 보았다.


일본인 간수 스기야마, 유이치, 조선인 죄수 윤동주를 이은 것은 평화협정 따위가 아니라 ‘시’였다. 전쟁은 얼마나 나약한가.


아래는 연합군 전범 조사관이 유이치를 심문하던 중 나온 대화다.


(연합군 전범 조사관) 허구가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와타나베 유이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죠.

(연합군 전범 조사관) 당신의 기록은 일본인에게 부끄러운 역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와타나베 유이치) 부끄러운 진실 또한 진실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운 거짓보다 부끄러운 진실을 택할 것입니다. 욕된 진실을 인정해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문단


< “책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어갈까?”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낱말과 조사와 구두점이 모인 문장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삶을 시작한다. 책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헌책방과 도서관으로 긴 여행을 한다. 누군가의 가슴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우듬지를 이루는 동안 책장은 찢어지고 표지는 낡고 글자들은 바랜다. 그리고 어느 날 먼지와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 영혼은 우리 가슴속에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책은 죽지 않는다. >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쉽게 씌어진 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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