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주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부담스럽기만 한 토마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구속되는 것을 끔찍해 한다. 그에게 존재란 가벼운 것이다. 반대로, 테레자는 토마스가 자신만을 바라봐 주길 바란다. 그녀에게 존재는 지극히 무거운 것이므로.

그 둘의 충돌은 삶에 대한 가치관의 충돌이다. 삶은 무거운 걸까, 가벼운걸까.

사실, 두 사람이 가진 사랑과 삶에 대한 가치관은 '같은 전제'에서 나온다. '인생은 한번뿐이기 때문에' 인생의 짝과 평생 마음을 나눠야하고, '인생은 한번뿐이므로'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눠야 한다. 토마스와 테레자는 같은 전제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했을 뿐.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아니다. Einmal ist keinmal. 한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허락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려는 토마스..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싶은 테레자..

이 중의적 말을 곱씹으며 흘러흘러 가다보면 결국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하는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토마스와 테레자는 모두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산다는 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너무나도 철학적이고, 매력적인 책.



[가벼움과 무거움]


삶은 항상 밑그림과도 같은 것이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무거움),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가벼움)


[슬픔과 행복]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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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그의 침대 머리캍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그는 그녀 곁에서 죽고 싶었다고 확신했는데, 그 감정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다. 자기가 사랑의 부적격자임을 뼈져리게 깨달은 한 남자가 스스로에게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면서 빠져들었던 신경질적인 반응은 아니었을까? 동시에 그의 무의식은 너무도 비열한 나머지 이 희극은 위해서 자신의 삶에 동참할 만큼 격상될 기회라곤 거의 없는 촌구석의 불쌍한 종업원을 선택한 것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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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테레자와 함께 산 칠 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 시절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우연]


-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길 수 있다. p.21


-테레자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p87)

그 술집에 토마시가 있었다는 것은 테레자에게 있어 절대적 우연의 발현이다. 테레자는 카운터로 코냑을 가지러 가면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베토벤의 음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베토벤은 그녀가 희구하던 세계의 이미지, ‘저쪽’ 세계의 이미지가 되었다. 지금 카운터에서 코냑을 들고 토마시에게 다가가는 그녀는 이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호감이 가는 이 낯선 남자에게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들리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 토마시 대신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자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 싹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베토벤과 푸줏간 주인의 만남 역시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지만.) 그녀는 그 음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그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p93)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그가 아파트 문 앞에 나타났고, 잠시 후 프라하의 교회 종이 6시를 알렸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6시에 일을 끝마쳤다. 그녀는 노란 벤치에 앉아 있던 그를 마주 보았고 쨍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아니다, 그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민으로부터 그녀를 불쑥 구원하고 새로운 삶의 욕구를 그녀 가슴에 채워 준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의 의미였다. 다시 한 번 우연의 새가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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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나 때문에 질투한 게 사실이야?” 그녀는 마치 노벨상 수상자로 지목되었으나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사람처럼 수십 번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고 방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머지않아 질투심을 갖기 된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토마시에게 그녀의 질투심은 노벨상이 아니라, 죽기 전 겨우 한두 해 정도만 벗어날 수 있었던 짐이었다.


[육체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녀가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 욕실을 잠그는 것은 금지였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를 바 없다. 너에겐 수줍어 할 권리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감출 이유가 없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토마시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 보낸 셈이다.


-어머니는 요란하게 코를 풀고 자기 성생활에 대해 구석구석 털어놓고 틀니를 꺼내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든 행동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내팽개치려는 유일하고 격렬한 몸짓이었다. 그녀는 수줍음을 자기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


그녀는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추억]


-사비나의 삶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는 영원히 되풀이되었으며 매번 다른 의미를 띠었다. 그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산모자를 거쳤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헤라크레이토스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대상이 매번 다른 의미를 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켰다.


-이제 아마도 사비나와 프란츠를 갈라놓은 심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그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귀담아 들었고, 그녀 역시 그의 말을 똑같이 탐욕적으로 들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말의 논리적 의미는 정황하게 이해했으나 이 말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상식은 열여덟 나이에 얻은 모든 편견들의 집합체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프란츠는 책에 파묻힌 그의 삶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그가 비현실적이라 판단했던 것(도서관에 고립된 그의 연구 생활)이 그의 현실이며, 그가 현실이라 간주했던 시위 행렬은 하나의 볼거리, 춤, 축제, 달리 말하면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는 데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사비나와 프란츠 - 사랑의 내밀성]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프란츠는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함. 그러나 여기서 사비나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됨. 첫째, 이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둘째, 이 말 때문에 프란츠는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한 것.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환상 속에 사는 프란츠..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그의 자유와 새로운 삶이 부여한 그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희열, 이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들 사랑을 위해 매번 가슴 조이던 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신으로 변모한 사비나와 함께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


[카레닌의 미소]


자기와 비슷한 대상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아무런 미덕도 아니다. (469)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순간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낙원에서는 인간이 아직 인간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아직 인간의 노정에 던져지지 않았던 것이다.


낙원에 대한 향수,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고 싶지 않은 욕망이다.


개는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 카레닌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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