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인 권태기일까? 어느 순간, 무거운 책이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책을 사서 수집하고 읽는 것을 즐긴다. 남자친구가 아이패드를 사줬을 때 처음으로 전자책을 읽어 봤지만, 이내 교보문고 어플리케이션을 꺼 버렸다. 지나치게 선명한 LED 화면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내 마음은 종이책을 밀어내고 있다. 종이책의 ‘무게’가 나를 늘 괴롭게 만든 탓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비교할 대상이 생기면 그 쪽으로 눈길이 가기 마련인 법. 눈 아픈 태블릿 PC가 아니라, 종이책의 느낌을 그대로 구현하는 전자책 단말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나의 관심은 전자책에 쏠려 있다. 이것이 가벼운 권태기인지, 결별을 준비할 만큼 큰 변화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오로지 종이책만을 외곬으로 읽던 내가 전자책 단말기를 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나를 변화시킨 건 한 권의 책이다. 제이슨 머코스키의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 그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의 e-북 리더기 ‘킨들’을 개발했다. 그는 전자책을 두고 ‘항생제 발명과 전기 발명 이후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제품에 대한 자신감 때문은 아니다. 머코스키는 항생제나 전기가 인류사에 거대한 물주기를 만들어 냈듯, 킨들이 인류 문화의 큰 변화를 상징한다고 봤다. 우리가 종이책을 보지 않고 전자책을 보는 것은 단순히 행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류가 이때까지 써 온 문화와 관습, 지식 계승 방식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토판,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기원전 5세기의 양피지 두루마리, 종이... 인류는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디지털화'한 책은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기록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인류가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독서 방식을 바꾼다면, 종이책이 만든 문화는 사라질 것이다. 종이책의 묵직한 두께감, 오래된 서재에서 나는 먼지 냄새, 책장 속에 숨겨진 연애편지, 손 글씨, 꽃잎을 말린 책갈피, 책을 빌려주던 정겨움. 오감(五感)을 자극하던 종이책은 사라지고, 가볍고 매끈한 기계가 책의 모습을 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머코스키의 소회는 이렇다.


<전자책에서는 퀴퀴한 도서관 냄새나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 책갈피에 끼워두고 잊어버렸던 라일락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다. 포름알데히드와 플라스틱 냄새나 과열된 배터리의 금속 냄새가 날 것이다.>


<그 책들이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책이 나를 어떻게 회상하는지, 페이지 사이에 나의 어떤 부분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내 삶의 간이역과도 같다. 내 책의 페이지 사이에는 내 삶의 역사가 담긴 캡슐이 들어 있다.>


독서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전자책은 독서를 소통의 영역으로 바꿀 것이라고 한다. 전자책 단말기가 조금 더 발전하면, 우리는 책의 챕터나 페이지에서 전 세계의 독자가 남긴 설명이나 주석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이 특정 대목에서 어떻게 느꼈는지 즉각 볼 수 있고, 그 페이지에서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물론 저자와도 말이다.


<독서는 한 인간과 한 권의 책 사이에 이루어지는 고독한 상호관계다. 독서 경험은 사회적인 본성과 상반되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사회적인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 독서 경험을 고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은 클릭 한 번만으로 책의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여러 작가들의 서로 상반되면서도 다양한 통찰력을 얻고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링크를 통해서 작가는 당신이 읽고 있는 바로 그 페이지에서 토론을 벌일 수 있고 당신은 어떤 작가나 아이디어가 승리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구리 광맥이나 금 광맥을 따라가듯이 서로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다.>


또 중고책 시장의 모습도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전자책에는 중고책이 없다. 늘 새것으로 유지된다. 지금은 전자책을 사면, 단말기 5개 정도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안다. 이것을 누군가에게 싸게 팔거나 빌려줄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생기면 중고책 시장은 또 다른 모습으로 떠오를 것이다.


<전자책은 종이책 종말의 전조일까, 아니면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구원자일까? 전자책은 우리의 독서 경험을 고양할까, 아니면 오히려 독서에서 멀어지게 할까? 이 실험적인 책의 형태는 책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책을 인류 문화의 명예로운 자리에 올려놓을 것인가? 독서 습관이 바뀌면 우리는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을까?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머코스키가 고민하는 것처럼, 지금은 중간에 걸친 시대기 때문에 독서문화의 미래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터넷이 발달하는 시대도 겪었다. 완전히 아날로그 시대도, 디지털 시대도 아닌 ‘낀 세대’. 디지털 기술의 실험적 발명이 왕성하고 앞으로 수 년 간 그럴 것이다. 분명, 독서 문화는 바뀌고 있다. 서서히 과도기를 향해 갈 것이고, 독서의 많은 부분을 전자책이 차지하게 될 터다. 우리나라는 전자책 시장이 아직 1~2%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시장은 13%정도이며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다. 아마존에서 팔리는 책의 절반이 전자책이라고 하니, 독서 문화의 변화가 얼마나 빨리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이 된다. 머코스키는 10년 안에 인류의 절반이 전자책을 이용할 것이라 분석한다. 인류가 갈수록 기술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게 그 이유다.


<미국에서 냉장고가 처음 선보인 후 미국 전체 가구 중 50퍼센트가 냉장고를 보유하기까지 83년이 걸렸다. 수세식 변기는 냉장고보다 늦게 발명되었지만 조기다수수용자, 즉 인구의 50퍼센트가 사용할 때까지 겨우 43년이 걸렸다. 최근에 발명된 제품들을 보면 이러한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가구의 절반에 전기가 공급되는 데 22년이 걸렸고, 라디오는 19년, TV는 15년, 인터넷은 겨우 10년이 걸렸다.>


나 같은 외곬 역시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전자책 시장도 낙관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머코스키에 따르면, 전자책을 구입하면 사람들은 전보다 더 책을 많이 읽는다. 이것은 여러 나라 시장에서 이미 증명됐다고 말한다.


<나는 종이책의 한계를 알고, 전자책이 종이책의 자연스러운 계승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우리가 전자책 독자로서 책 읽기가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경험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독서 문화도 진화하고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가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인쇄술도 수세기 동안 진화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쇄술은 500년 전에 시작되었고, 이제 발전할 부분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든 종이신문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종이책은 이미 전자책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 년 전부터 줄기차게 제기 된 ‘신문의 위기’는 어떤 방향으로 논의될까? 머코스키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장단점을 모두 인정하지만, 본질적으로 문장을 읽는 행위에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신문 역시 종이로 읽는 것과 전자 단말기로 읽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는 말이 된다. 신문은 정녕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디지털 신문이 아닌 ‘종이 신문’의 유용함과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종이신문은 종이책과는 다르게 ‘지면’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종이신문은 지면구성을 통해 기사를 완성한다. 어느 곳에 어떤 크기의 박스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의제 설정 효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디지털 신문이 가지지 못한 기능이라고 본다. 현재 포털에서 나열식으로 전하는 기사는 우리에게 허기만을 남긴다. 물론 신문 지면을 그대로 옮긴 ‘아이서퍼’와 같은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그러나 작은 모니터 속에서 좌우로 이동하며 지면을 읽는 것과 종이를 펼쳐 전체를 읽는 것은 분명 다르다. 종이신문 하나를 다 읽었을 때의 안정감과 포만감은 결코 디지털이 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종이신문은 종이책과 다르게, 연애편지나 책갈피를 종이 사이에 끼워 넣을 수 없다. 일일이 스크랩을 하지 않는 이상 한번 보고 버리는 것이 종이신문이다. ‘일회용’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종이신문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 예컨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갱지 냄새 같은 것이 종이책이 주는 추억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종이’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독자가 원하는 한, 종이신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론, 종이 신문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는 모습도 상상할 수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앞으로 신문은 점점 ‘잡지화’할 것이라고 한다. 속보성 뉴스는 지면에서 사라지고 화려한 그래픽과 심층기사, 기획보도가 지면을 채울 것이라는 이야기다. 기로에 서 있는 종이 신문은 이미 몇 해 전부터 단순 사건사고 기사 대신 심층기사의 비율을 늘려왔다. ‘종이’신문이 가진 지면의 장점과 독자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심층기사가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한층 업그레이드된 종이신문의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머코스키의 말이 떠오른다. 


‘전자책은 종이책 종말의 전조일까, 아니면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구원자일까?’ 


종이신문의 위기는 종이신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지도 모른다. 세계신문협회는 지난해에 전세계적으로 신문 구독자 수가 2% 증가했다고 밝혔다. 종이신문과 디지털의 결합 덕택이다. 수전 라이트 캐나다신문 마케팅 혁신 담당 부사장은, '모바일 덕분에 오히려 뉴스 소비가 늘었다'고 말했다. 디지털의 물결이 종이신문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 준 셈이다. 전자책이 인류의 독서량을 늘렸듯. 


물론 우리는 부정적인 현상을 더 많이 봤다. 적자에 허덕이는 워싱턴 포스트가 아마존에 매각되던던 날 세계는 경악했다. 영국의 워싱턴 포스트가 온라인 서점에 인수될 정도면 다른 종이신문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 아닌가. 지면을 포기하는 것으로 생존을 모색하는 매체도 있었다. 영국 더타임스는 2010년에 디지털 지면을 전면 유료화하면서 종이신문의 역사에서 한 발짝 나왔다. 지금도 전세계 곳곳에서 신문사는 고심할 것이다. 윤전기를 돌릴 것인가, 멈출 것인가. 


하지만 종이신문의 미래가 결코 암울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책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듯, 종이신문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은 채 독자를 맞이할 것기 때문이다. 나는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디오가 그랬듯 말이다. 예술작품은 아니지만, 종이책과 신문에 '아우라'라는 표현을 붙여 보고 싶다. 종이에는 종이만의 아우라가 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라 칭한 그것 말이다. 


나는 지금 종이책에 권태를 느끼지만 당분간은 종이책과 전자책을 오가며 독서를 즐길 것이다. 변함없이 가판대에서 신문과 시사잡지를 사는 한편, 종종 아이서퍼에 접속해 모니터를 통해 지면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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